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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G. Lukács)의 저 유명한 문장, 즉 그가 『소설의 이론』을 열며 쓴 문구인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에서 지시하는 문명의 시간대는 언제인가? 서구 문화의 원전(原典)으로 불리는 고전기 그리스가 답이다. 루카치는 ‘별빛의 지도’라는 은유를 통해 이 시기가 우주와 인간, 자연 질서와 인간 의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고, 영혼의 전체성과 문화의 완결성이 갖춰진 ‘총체성의 시대’였음을 말하고자 했다. 동시에 그는 이 문장을 통해 자신의 시대인 근대(modern era)에는 그런 총체성과 조화가 불가능해졌음을, 그것이 이제는 낭만적인 언어 속에서 회고적으로밖에 불려나올 수 없음을 넌지시 시사했다.

그래서 루카치 식으로 말해 보자면, 근대와 그 이후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늘의 성좌 지도를 잃어버린, 그 우주와의 관계-로(路)가 끊어진 세계의 미아이다. 그 미아는 종 모양의 유리(bell glass) 아래 펼쳐진, 휘황찬란하지만 파편화된 세계의 축소판(miniature)을 보며 즐거워하고 만족할 것이다. 물론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 또한 흘려보낸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는 별이 떠 있기는 하고, 어쩌면 그로부터 우리가 가야만 할 길을 비추는 총명한 빛이 쏟아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의 별을 세며 우주의 원리를 읽으려하지 않고, 정말 그런 빛의 지도가 우리 앞에 펼쳐져있다 한들 읽어낼 만한 능력이 없다. 이런 시대적 경향을 식자(識者)들은 ‘총체성이 깨어진 시대’라고들 규정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 세계의 징후를 드러낸다.



작가 차영석이 지난 2007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건강한 정물>이라는 주제의 그림들은 생활의 잡다한 사물을 아주 많이, 오직 짧은 연필 선만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회화이다. 시리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사물들을 작가는 ‘건강한, 정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지점은 그런 ‘의미’에 있다기보다는, 우선은 ‘다수(多數)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차영석의 그림들에서 감상자는, 의미의 담지체로서 ‘삶의 건강함’이나 혹은 정반대로 ‘죽음에 대한 각성’(17세기 네덜란드 장르 회화 중 하나인 정물화가 애초 품었던 경구인 ‘네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을 읽어내기 이전에,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러 형태의 무수한 사물이미지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다. 난초가 그려진 화분에서 정작 시들어가는 진짜 난초, 희미한 연기를 피워 올리며 제 몸을 태우는 모기향, 근처에 놓인 선인장과 비슷한 모양으로 담배꽁초를 쌓아올리고 있는 재떨이, 산삼이 그려진 산삼주병이나 뱀이 그려진 뱀술병, 숯과 괴석과 장식용 물레방아와 동거하고 있는 동양난들, 목각인형과 러시아인형(Matryoshka)과 알약과 십자가와 물총과 녹용 따위들. 아마 감상자 대부분은, 말로 일일이 묘사하기에도 숨이 차는 이 다양하고 많은 수의 ‘물건 아닌 물건들’이 뿜어내는 매력에 길을 잃을 텐데, 이 글을 쓰는 내게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차영석의 그림에서 우리가 논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총체성이 깨진 파편적 세계에 대한 징후로서의 그림’, 이 점이 차영석 작품의 핵심이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무수한 파편들이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펼쳐진 <건강한 정물>은, 루카치가 ‘행복했을 것’이라 유추한 시대의 특성을 상실한 우리 시대, 즉 절대자 신(神)의 초월적 질서라든가 구원을 모르고, 소박한 현실을 넘어선 이념의 추구라든가 거대 서사의 추동에 무관심한 채, 그저 눈앞의 일상에 급급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행복한 순간이 드물고, 건강하지 않은 시대’의 징후를 증상으로 드러낸 그림이다. 왜 그런가? 어떻게 단지 연필 선으로 소박하게, 소소한 삶의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을 묘사해 늘어놨을 뿐인 그림에 그런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 말이 맞다. 그런데 바로 그 소박함, 소소함, 대수롭지 않음, 묘사, 그저 늘어놓음이 바로 차영석의 그림이 불지불식간에 드러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시대적 징후라는 것이다. 이를 화면 구성의 문제로 따져보자.

유추를 해보면, 화가는 <건강한 정물>의 그 수많은 사물이미지를 하나하나 그려나갔을 것이고, 감상자인 우리는 역으로 그렇게 그려진 사물들 하나하나를 그림의 표면에서 발견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여기서 ‘하나하나’는 인과의 순차성이라기보다는 우연의 파편성에 가깝다. 왜냐하면 차영석의 그림에서 ‘정물’로 제시된 것 모두는 어떤 화면 구성의 지배적 원리에 따라 상호 관계를 맺도록 그려졌다기보다는, 각각 개별자들의 연쇄로 ‘즐비하게’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난감 범선 옆에 동양화에나 등장할법한 기암괴석의 화초가 자리 잡은 이유를 모르며, 어딘가에서 상으로 받은 트로피와 원시미술 양식(primitivism)을 흉내 낸 조야한 조각상이 왜 그렇게 근접한 위치에서 묘사됐는지 그 문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그의 그림에서 배치의 인과성과 의미의 맥락을 찾는 일이야말로 어리석은 감상법일 수 있는데, 화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려 한 것 또한 거기에 있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차영석의 <건강한 정물>이 의도한 바는 어디에 있는가?



 앞서 내가 숨차게 열거한 차영석 그림의 정물 모티프, 아니, 그 모티프들의 집합적 풍경은 멀리 갈 것 모없이, 우리가 우리네 가정의 장식장이나 베란다에서 일상적으로 조우하는 모습과 닮았다. 당사자에모습과다 이유가 있고 필연적인 이야기가 있을지 모모르지만, 제3자의 시각으로 보면 가정집 선반이나 장식장의 풍경은 조금 기묘하고 정신 사나워 보인다. 한때 유행에 따라 사다놓은 장식품, 빛깔 모생김새 모제각각인 화초들, 건강에 좋다니까 들여놓은 자양강장제와 건강보조식품과 질료들뀨 풥적으로 숯!), 소박한 성취를 기념하는 상장과 상패들, 불교 · 기독교 ·  천주교 등의 종교적 물품들이 하찮은 생활도구들과 나란히, 그리고 뒤섞여있는 그 풍경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 모좋다면, 차영석의 <건강한 정물> 은 우리의 일상적 면모를 비추는 거울 풍경’이다. 거창한 미적 질서가 부여돼 있거나, 시각 조형언어의 방법론을 원용한 것으로 보기에는 분명 무질서하고, 단순한 첨가의 방식으로 그려진 듯 보이는 차영석의 일명 ‘정물화’는,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잡다한 사물을 쌓고 쌓으며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놓은 집안 풍경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가시적 표면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우리의 그림이 의미의 차원에서보다는 x우리이미지의 차원에서 감상자의 주의를 끈다고 말했으며, 그림의 모티프가 주는 시각우리즐거움이나워 보인내재우리의미 읽기에 우선하는 것 같다고 썼다. 하지만 차영석의 ‘건강한 정물’ 그림이 지금 여기 삶의 일상성과 파편성을 비추는 지점, 그 시대적 특성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지점은 의미의 층위에도 있다.

우리가 ‘건강한 삶’을 희구하면서 들이는 노력의 과정을 되돌아보자. 거기서 우리는 안팎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 그러니까 육체와 내면이 고루 튼튼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눈앞의 관심과 손익계산을 넘어서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해 가는 자신이 아니라, 지극히 일시적이고 현실적이며 단편적으로 외부세계에 부단히 대처해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한때 몸에 좋다니까 너도나도 거실에 들여놓은 ‘산세베리아’ 화분이, 그러다 노화방지에 좋다니까 또 사다놓은 ‘비타민’ 알약 통이, 커피마시기 유행에 따라 갖춘 커피기구 일습이, 그런 일시성과 파편성의 잔여물이지 않은가? 그래서 차영석의 <건강한 정물>은 무수히 많은 정물 모티프를 하나하나 그려나감으로써, 우리가 건강한 삶을 위해 들이는 노력과 원리상 조응하고, 그 ‘건강함’이 결국 현실에 정지해있는(still) 평범한 이들의 소망임을 의미상 짚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각종 사물들을 긁어모아 ‘건강함’을 확보하려 한다면, 차영석은 화면에 그 사물의 디테일을 수집하고 묘사하여 그 ‘건강함’의 실체적 의미를 완성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정지된 삶(still-life)’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정물(still life)’로서.



 서두에 인용한 루카치가 고대 그리스의 총체성을 낭만적으로 읊조리며 근대사회의 파편성을 거기에 대비시키기 이전에, 니체(F. W. Nietzsche)는 근대를 ‘데카당스(decadence)’로 규정했다. 하지만 후자에게는 쇠퇴와 몰락으로서의 근대만이 아니라 사건과 순간의 시초로 긍정되는 시대로서의 근대 비전이 동시에 있었다. 그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는 (...) 하나의 퇴락(decadence)이며 시초이다, (...) 나는 둘 다를 알며 나는 둘 다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개인 니체가 아니라 비인칭적이고 비인간적인 의미의 ‘나’, 어떻게 보면 ‘시대’를 지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근대는, 과거 종교의 금욕주의에 억눌린 자유, 도덕과 윤리의 거대서사 속에서 부정된 몸의 감각과 그 향유를 회복시키고 창조할 “모서리”의 시간대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더없이 근소한 것, 더없이 조용한 것, 더없이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숨결 하나, 한 순간, 눈길 하나. 이처럼 자그마한 것이 최상의 행복을 만들어낸다. 조용히 하라!”

나는 지금까지 차영석의 <건강한 정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쩌면 당사자인 작가나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지금 여기 우리 시대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처럼 들릴만한 언급을 했다. 아무래도 파편보다는 총체성이, 디테일보다는 전체가, 단순 열거보다는 종합적 구성이, 당면한 가시적 현실보다는 지향할 초월적 세계가 더 크고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논의가 부정적으로 읽히는 것은 나 자신이 자초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니체의 철학을, 특히 극히 작은 것들의 “뉘앙스”로부터 최상의 행복이 생성된다는 그의 사유를 인용하면서, 나는 깨진 총체성에 대한 긍정, 디테일의 비가시적 의미에 대해 일깨우고 싶었다. 차영석의 그림이 그런 특수한 기능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강수미 /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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